외교협회 신년회 인사 말씀
존경하는 반기문 제8대 유엔 사무총장님을 비롯한
선배 장관님들과
오늘 행사를 주최하신 신봉길 외교협회 회장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선배 동료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랫동안 뵙지 못했던 선배님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서
뵙고 새해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반갑고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신 외교협회 측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5년 을사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만,
2024년의 끝자락에 경험한 충격과 아픔이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어 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난 한달간 있었던 모든 불행한 사태에 대해
외교부 장관으로서, 그리고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고
특히 여러 선배님들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혼돈의 시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만
짐이 너무 무겁고 현실은 너무 가혹합니다.
새해는 모든 혼돈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새 질서를 찾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해야 할 책무를 다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드리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선배 동료 여러분,
국제사회는 이번 계엄령 선포 이후 수습 과정에서
우리 민주주의의 복원력이 발휘되고,
민주적 헌법 절차가 작동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일각에서는 국내 상황이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국내 정치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외환·금융시장의 변동성도 커지기 때문에
우리 경제의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앞에 밀려오는
대외적인 풍랑은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신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고,
국제관계에 대한 거래적 관점으로 인해
전통적 동맹·우방과의 연대는 물론 규범에 기반한
다자질서마저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선진국들도
같은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틈타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는 국가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강대국간 전략경쟁도 한층
심화될 것입니다.
미국 신행정부 출범 후 우크라이나 전쟁 및 중동사태의
조기 종식 노력이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한반도, 대만해협, 남중국해 등 인태 지역의
긴장 요인은 그대로 남아있거나 오히려 정세가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전례없는 지정학적 대 격동기에 기민한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 속에서 우리 외교는 미증유의 국내
정치적 갈등 상황으로 인해 손발이 묶여 있는 형국입니다.
대한민국이 지난 70여 년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쌓아온
위대한 성취는 우리의 소중한 외교적 자산입니다.
이번 사태로 우리의 국제적 이미지에 손상을 입었다 해서
그동안 우리가 공들여 쌓아온 외교적 성과를
우리 스스로 폄훼하고 부정하며
가던 걸음을 멈추거나 방향을 틀기에는
작금의 국내외적 도전이 너무나 복잡하고 엄중합니다.
지금은 “위기를 절대로 낭비하지 말라”
(Never let a crisis go to waste)는 처칠의 명언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외교 정책의 진폭을 줄이고 일관된 비전과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적어도 국가 백년대계를 좌우할 외교의 방향에
대해서만큼은
온 국민이 인식을 같이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교부가 중심을 잃지 않고
냉정하고 차분하게 조타수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들이 보시기에 안타깝고 답답하기도 하고 꾸짖고
싶으신 일도 많겠지만, 지금은 저희 후배들에게
질책보다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때이니 채찍은 잠시
내려놓으시고 힘을 보태 주셨으면 합니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선배님들의 지혜와 경륜이
절실합니다. 건전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그 비판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부가 지난 2년 반 동안 가치 외교에 매몰되어
우리 외교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 왔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권위주의의 도전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가치와 국익을 상충하는
개념이나 양자택일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도움이 된
보편적 가치와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민주주의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대한민국이 지난 70여 년간 여러 국내적인 난국을
극복하고 지켜낸 소중한 민주적 가치들을
대외정책에서는 소홀히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입니다.
지정학적 환경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한 유연성은
필요하겠지만 우리 외교가 지향해야 할 목표와 비전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수많은 외교적 과제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이제 2주도 채 남지
않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트럼프 당선인이나 당선인 측근과의 대면 접촉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두고
우리만 권한대행 체제이기 때문에 소외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만 겪고 있는
어려움이 아니며, 그로 인해 한미동맹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바도 없습니다.
정부는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트럼프 진영과의 소통
채널을 유지하고 있고, 2기 행정부 출범 후 빠른 시일
내에 본격적인 협의 채널을 구축하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와 함께 바이든 행정부와는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의 모멘텀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마지막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 있었던 블링컨 국무장관과의 회담은
이러한 양국의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2년 반 동안의 우리 외교가 한중관계에 파탄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 비판을 하는 분들에게는
우리 주도로 작년 5월 4년 반 만에 재개한 한일중
정상회의와 그 계기에 이루어진 리창 총리의 방한,
저와 왕이 부장 간 세 차례에 걸친 공식 회담과 수시
통화, 그리고 11월 페루 APEC 계기에 개최된
한중정상회담 등 지난 한 해 동안 이루어진
한중 양국 간 고위급 교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정부는 지난 2년 반 동안 중국과의 관계를 상호 존중,
호혜, 공동 이익의 원칙에 기반한 건강한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고, 이견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당당한 자세로 솔직하고
투명한 대화를 지속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한중관계의 긍정적 변화는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 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노력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되어야
한중관계가 건강하고 성숙한 관계로
발전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금년은 우리가, 내년에는 중국이
APEC 의장국을 수임하게 됩니다.
정부는 이러한 접점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한중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
나가고자 합니다.
일본과는 금년에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고위급 교류를 이어 나가면서 협력의 모멘텀을
계속 강화해 나가고자 합니다.
어렵게 일궈낸 한일관계 개선의 흐름을 멈추거나
정체시키기에는,
더구나 국교정상화 60주년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기에는 양국간 협력의 잠재력과 양국이 공동으로
직면하고 있는 도전이 너무 큽니다.
한일관계 개선과 한미일 협력 심화가
톱니바퀴처럼 선순환하는 구조가 더욱 깊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남은 기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올해 일본이 의장국을 맡게 되어 있는
한일중 협력도 더욱 활성화하여
역내 주요 소다자 협의체로 안착시키고자 합니다.
조만간 방한하게 될 이와야 외무대신과 함께
이 모든 문제들을 진지하게 협의할 생각입니다.
저는 앞으로 더욱 심화될 불확실성에 우리 외교가
안정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틀에서의
장기적인 국가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지난 2년 반 동안 기존의 한미동맹에 더해
G7, NATO 등 가치 공유국들과 다층적인 소다자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것은 바로
그런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G7과의 파트너십 강화는
단순히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들 국가와의 정책적 동조화를 통해
우리 외교 정책의 일관성을 확보하는 틀을 만들고,
우리 국가경영시스템을 G7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외교적 전략 기제로 활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NATO와의 협력을 제도화하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 온 것도
인태 지역과 유럽 지역의 안보 간 상호 연계가
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작년 6월 체결된‘러북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조약’의
내용에서 보듯이 작금의 러북관계는 냉전 시대의 동맹을
방불케 합니다.
러북 밀착이 우리의 잘못된 대북·대러 정책 때문이라는
비판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러·북 협력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양국의 필요에 따라 군사협력의
양태로 더욱 밀착된 것이지 우리 정책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냉전 시대에도 보지 못한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까지
목도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러시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예전처럼 관계를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정부는 우방국과 함께 러북 불법 군사협력 중단을
지속 촉구해 나가는 한편,
우크라이나 전황, 러북 군사협력의 진전 추이,
미국 등 NATO 회원국의 대응 동향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러시아에 대해
단계적이고 실효적인 대응조치를 검토해 나갈 것입니다.
동시에 러시아와 소통의 끈을 놓지 않고
한러관계의 전략적 관리를 위해 지속 노력할 것입니다.
러시아가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중요한 행위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북핵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 신행정부 출범 후
미북 직접 협상 추진 가능성에 대비하여
우리의 대응 구상과 로드맵을 마련해
선제적으로 대미 협의를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한미간 긴밀한 사전 조율을 통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 대북정책 방향에 대해
공감대를 이루어 나가겠습니다.
다자 무대에서도 우리의 위상과 신뢰를
조기에 회복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2025년은 우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인권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이사국을 동시에 수임하고
중견국 협의체인 MIKTA 의장국까지 맡게 된 중요한 해입니다.
정부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해
글로벌 평화와 번영에 대한 우리 정부의
변함없는 기여와 협력 의지를 실천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금년 경주 APEC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도록
가용자원을 모두 동원해 착실히 준비해 나가겠습니다.
경제안보를 지키는 데에도 빈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미국 대선 이후 매주 월요일에
경제부총리, 산업부 장관과 대외경제현안 간담회를 갖고
미국 신행정부 출범에 대비한 준비 작업을 꼼꼼히
점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긴밀한 민관 공조 체제를 유지하면서
기업 등의 민간 분야 역량을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정부 채널의 동력을 보완해 나가고자 합니다.
미국 신행정부 출범 후
예상되는 다양한 경제적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잠재적 리스크 요인을 관리해 나가면서
기회 요인은 적극 활용하여
한미 양국이 미래지향적 경제협력을
지속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트럼프 당선인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시 언급한
조선업 분야를 포함한 경제협력 방안을 마련하여
우리가 최적의 협력 파트너라는 점을
트럼프 신행정부 출범 초기부터 각인시켜 나가겠습니다.
또한 작금의 국내 상황이 우리 기업 활동과 외국인 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경제외교를 강화하고,
공급망 교란과 에너지 위기 등
경제안보 현안에도 적극 대처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저는 얼마 전 바로 이 건물에서
경제부총리와 함께 외신 기자 합동 간담회를 열고
이번 사태가 우리 경제와 외교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외 메시지를 발신한 바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배 동료 여러분,
공화당 소속의 상원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루즈벨트-트루먼 대통령을 도와
2차 대전 수행을 지원하고,
냉전 초기 대소 전략에 대한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냈던 아서 반덴버그는
“정쟁은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
(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새해에는 대한민국 외교가
진영 논리의 강을 건너
거센 파도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정치권이 깊은 성찰을 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 선배 동료 여러분들께서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해 주시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후배들의 열정과 헌신에
선배님들의 경륜과 지혜가 담긴 성원이 더해진다면
작금의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
굳게 믿습니다.
모쪼록 새해에는
지난해의 아픈 기억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여기 계신 모든 선배 동료 여러분들께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기원하면서
새해 인사 말씀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긴 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늘 건안하시길 빕니다. 끝.